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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야 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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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미야 린조는 1775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탐험가이자 에도 막부의 관리였다. 그는 측량 기술을 배워 홋카이도 이북 지역을 측량하여 지도 제작에 기여했으며, 사할린이 섬임을 확인하고 마미야 해협을 발견했다. 또한, 흑룡강 하구를 탐사하여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쇄국 정책 하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말년에는 밀정으로 활동했으며, 사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과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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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야 린조
기본 정보
마미야 린조 ([[마쓰오카 에이큐]] 그림)
마미야 린조 (마쓰오카 에이큐 그림)
시대에도 시대 후기
출생안에이 9년 (1780년)
사망덴포 15년 2월 26일 (1844년 4월 13일)
묘소도쿄도고토구 혼류지
이바라키현쓰쿠바미라이시 가미야나기의 센쇼지
증위정5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씨족마미야 씨
자녀여자, 데쓰지로
인물 정보
이름마미야 린조 (間宮 林蔵)
로마자 표기Mamiya Rinzō
가족 관계

2. 생애

마미야 린조는 에도 막부의 관리이자 탐험가로, 사할린 탐험과 지도 제작으로 유명하다. 특히 사할린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지 않은 섬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미 1787년 장 프랑수아 드 라페루즈가 타타르 해협(일본명: 마미야 해협)의 대부분을 측량하면서 발견한 바 있다.[1]

1852년 마미야의 지도는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에 의해 유럽에서 출판되었다.

2002년에는 마미야 린조에게 아이누 여성과의 사이에 딸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홋카이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

1810년에 마미야 린조가 작성한 사할린(樺太)의 지도

2. 1. 출생과 초기 활동

마미야 린조는 1775년 현재 쓰쿠바미라이시인 히타치국 쓰쿠바군 가미히라야나기무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4] 고가이가와 강가에서 태어났으며, 전국 시대에 후호죠씨를 섬긴 우다 겐지 사사키씨 분류 마미야씨의 시노가죠 성주 마미야 야스토시의 후손으로 마미야 세이우에몬 계통의 후예이다. 생가 근처 센쇼지에서 공부했지만, 특히 산술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4]

당시 막부는 톤네가와 동천 사업을 실시하고 있었고, 린조가 태어난 근처에서 수문( 관동 3대 수문 중 하나, 오카제키) 공사를 하고 있었다.[4] 이 작업에 참여한 린조는 막신 무라카미 시마노죠에게 지리와 산술의 재능을 인정받아, 후에 막부의 하급 관리가 되었다.[4]

간세이 12년(1800년)에 무라카미의 종자로서 에조치에 처음 파견되어, 그곳에 측량 조사를 와 있던 이노우 타다타카를 만나게 되었다.[4] 그 후 이노우로부터 직접 측량 기술을 배우고, 에조치와 남쿠릴 열도의 측량에 종사했다.[4] 쿄와 3년(1803년), 서에조치(일본 해안 및 오호츠크해 연안)를 측량하고, 울룹섬까지의 지도를 제작했다.

분카 4년(1807년) 4월 25일, 엣토로 장소(간세이 12년(1800년) 쿠나시리 장소에서 분립. 엣토로섬)의 사나 회소 원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 막부로부터 통상 요구를 거절당한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복수를 위해 부하인 등에게 시킨 동섬 습격(분카 러일 분쟁)에 휘말렸다. 이때, 린조는 철저 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후퇴했다. 후에 다른 막리들이 후퇴의 책임을 추궁당해 처벌받는 가운데, 린조는 항전을 주장한 것이 인정되어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2. 2. 사할린 탐험

1808년, 마미야 린조는 에도 막부의 명령으로 마쓰다 덴쥬로와 함께 사할린 탐험에 나섰다.[4] 소야 곶에서 출발한 마미야는 사할린 동해안을, 마쓰다는 서해안을 탐험했다.[4] 마미야는 타라카 만 연안의 샤쿠코탄(산코 군 산코 촌)까지 북상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워 남하하여, 가장 좁은 곳인 마누이(에이함 군 시라누이 촌 마누이)에서 사할린을 횡단하여 서해안 쿠슌나이(큐슌나이 군 큐슌나이 촌)에 도착, 해안을 북상하여 북사할린 서해안 노테토에서 마쓰다와 합류했다.

마미야는 아이누어를 이해했지만, 사할린 북부에는 아이누어가 통하지 않는 오로크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다. 마쓰다와 함께 북사할린 서해안 라카에 도착하여 사할린이 섬이라는 추측을 얻고 "대일본국 국경" 표주를 세웠다. 1809년 7월, 소야로 돌아온 마미야는 막부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고, 다음 달 다시 사할린 북부 탐색을 요청하여 허락받고 단독으로 사할린으로 향했다.[4]

마미야는 현지에서 아이누 종자를 고용하고 사할린 서해안을 북상하여, 이전 탐색보다 더 북쪽으로 가서 흑룡강 하구의 대안에 있는 북사할린 서해안 나니오에 도착, 사할린이 반도가 아니라 섬임을 확인했다. 또한, 마미야는 사할린 북부에 거주하는 길리아크인(니브흐)에게서 청나라 관청이 있다는 흑룡강(아무르 강) 하류의 마을 "데렌"의 존재와 러시아 제국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쇄국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리아크인 등과 함께 해협을 건너 아무르 강 하류를 조사했다.[7] 이 기록은 『동달지방기행』에 남아 있으며, 러시아 제국이 극동 지역을 충분히 지배하지 못하고 청나라 사람이 많은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4] 당시 아무르 강 유역의 외만주는 넬친스크 조약에 의해 청나라 영토였다.

마미야 린조는 사할린이 섬임을 확인한 인물로 인정받아, 지볼트는 후에 작성한 일본 지도에서 사할린・대륙 사이의 해협 가장 좁은 곳을 "마미야노세토"라고 명명했다. 해협 자체는 "타타르 해협"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1809년 11월, 소야로 돌아온 린조는 마쓰마에 부교소에 귀환 보고를 하고, 마쓰마에에서 탐색 결과 보고서를 작성, 스승인 무라카미 시마노죠의 양자인 무라카미 사다스케에게 구술을 필기시켜, 『동달지방기행』, 『북이분계여화』로 정리하여, 1811년 1월, 에도에 가서 지도와 함께 막부에 제출했다.

2. 3. 밀정 활동과 말년

1828년 마미야 린조는 무라가키 사다유키(村垣定之) 회계 관리의 부하가 되어 막부를 위해 전국의 여러 지역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세키슈 하마다 씨족(石州浜田氏)의 밀수 실태를 파악하여 오사카 마을 관리인 야베 사다카즈(矢部定謙)에게 보고했다. 그는 용의자 체포로 이어지는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이를 다케시마 사건이라 한다.[1] 같은 해 지볼트 사건이 일어났지만, 지볼트로부터 다카하시 가게야스에게 보내는 서한에는 마미야에게 보내는 소포도 포함되어 있었고, 마미야는 당시 막부의 규정대로 이것을 신고했기 때문에 사건이 발각되었다는 설이 있다.[4]

그 후, 탐색에서 갈고 닦은 에조·사할린 지방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해방에 대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로주 오쿠보 다다자네에게 중용되었다.[4] 또한, 가와지 도시야키라나 에가와 타로자에몬 등과도 친교를 가졌다. 당시 에조치의 지배를 책략하고 있던 미토번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초대를 받아 미토번 저택 등을 드나들며 나리아키에게 헌책하고[4], 후지타 도코 등과 교류했다.

말년에는 몸이 허약해져 밀정 활동도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4] 1844년 4월 13일, 에도 후카가와 하마구치쵸[8] 또는 혼조소토테쵸[9]에서 사망했다. 매독을 사인으로 하는 설도 있다.[10] 아이누 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친자가 있으며, 그 자손은 현재에도 홋카이도에 거주하고 있지만, 가독은 아사쿠사의 구라데시로[11] 아오야기가에서 양자로 들어온 데쓰지로(효준)가 상속했다.

묘소는 도쿄도 고토구의 혼류인과 이바라키현 쓰쿠바미라이시 가미야나기의 센쇼지에 있다.

1904년 4월 22일, 정오위에 추증되었다.[12]

3. 업적 및 평가

이노우에 타다유키에게 측량 기술을 배운 마미야 린조는 홋카이도 측량을 통해 대일본연해여지전도 제작에 기여했다. 그가 발견한 해협은 시볼트에 의해 마미야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마미야 린조는 만화와 소설 등 대중 문화 작품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3. 1. 측량술 발전

이노우에 타다유키가 마미야 린조에게 측량 기술을 가르쳐 그의 측량 정확도가 향상되었다. 일정상 이노우에 타다유키가 홋카이도를 측량할 수 없었을 때, 마미야 린조가 대신 홋카이도를 측량하여 측량도를 만들었다. 그 결과,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홋카이도 이북 지도는 최종적으로 마미야 린조의 측량도가 되었다. 이후 마미야 린조가 발견한 해협은 시볼트에 의해 마미야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3. 2. 마미야 해협 발견

이노우에 타다유키가 마미야 린조에게 측량 기술을 가르쳐 그의 측량 정확도가 향상되었다고 한다. 일정상 이노우에 타다유키가 홋카이도를 측량할 수 없었을 때, 마미야 린조가 대신 홋카이도를 측량하여 측량도를 만들었다. 그 결과,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홋카이도 이북 지도는 최종적으로 마미야 린조의 측량도가 되었다. 이후 마미야 린조가 발견한 해협은 시볼트에 의해 마미야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3. 3. 대중 문화

마미야 린조는 만화 시리즈 《신 고즈레 오카미》(신 론 울프 앤 큐브)에서 두 명의 주요 악당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이 버전에서 그는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수하이면서 그의 친아들이며, 원래 인물을 살해한 후 다른 신분을 취하는 변장의 명수이다. 그는 마쓰다이라보다 더 무자비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여러 닌자 집단을 이용하고 아편을 이용하여 쇼군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꾀어내고 통제한다. 마미야의 역사적 탐험이 언급되지만, 이 버전에서는 단순한 탐험보다 더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픽 노블 작가 션 마이클 윌슨은 마미야를 전기에 등장시켰으며, 이 전기는 "마미야의 지도: 사무라이가 탐험한 사할린"이라는 제목으로 그래픽 노블로 출판되었다.

4. 유적 및 기념물


  • 도쿄도 고토구 혼다테인에는 마미야 린조가 생전에 스스로 세운 묘가 있으며, 묘비에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묘는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파손되었으나, 1946년탁본을 기반으로 재건되었다. 1955년에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쓴 기념비가 경내에 세워졌다.[13]
  • 이바라키현 츠쿠바미라이시 가미야나기의 센쇼지에는 마미야 린조가 에조치 탐사에 앞서 세운 묘가 있다. 묘비 글씨는 마미야 린조의 자필이라고 전해지며, 1955년 이바라키현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옆에는 부모의 묘와 시가 시게타카 등이 건립한 현창비가 있다.[13]
  • 이바라키현 츠쿠바미라이시 가미히라야나기에는 마미야 린조의 생가 터에 인접하여 관련 자료와 유품 등을 전시한 '마미야 린조 기념관'과 이축한 생가가 있다.[13]
  •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의 오가이가와오카제키에는 '마미야 린조 입상'이 있다.[13]
  • 홋카이도 와카나이시 다이니세이하마 지역에는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으로 건너갔을 때의 출발 추정지로서 '마미야 린조 도카 출항의 지비'가 세워져 있으며,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행에 가지고 갔다고 전해지는 묘비가 있다.[13]
  • 홋카이도 와카나이시의 소야미사키에는 탄생 200년을 기념하여 1980년 7월에 세워진 조각가 미네 다카시 작의 브론즈상 '마미야 린조 입상'이 있다.[13]
  • 1999년 9월, 아마추어 천문가 와타나베 카즈로가 발견한 소행성 12127번은 마미야 린조에 헌정하여 'Mamiya'로 명명되었다.[13]

5. 관련 작품

코이케 카즈오・모리 히데키의 만화 ''신・자식과 함께 늑대''에서 마미야는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수하이면서 친아들로 묘사된다. 그는 변장의 명수로, 원래 인물을 살해한 후 다른 신분을 취한다. 마미야는 마쓰다이라보다 더 무자비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여러 닌자 집단을 이용하고 아편을 이용하여 쇼군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꾀어내고 통제한다. 마미야의 역사적 탐험이 언급되지만, 이 만화에서는 단순한 탐험보다 더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션 마이클 윌슨은 그래픽 노블 "마미야의 지도: 사무라이가 탐험한 사할린"을 출판하여 마미야를 등장시켰다.[1]

무라카미 사다스케(村上貞助)는 마미야 린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북이분계여화」,「동타지방기행」,「궁발기담」을 저술하였다. 이 중 「동타지방기행」은 평범사 동양문고에 수록되었다.[2]

유자 고가 도안(古賀侗庵)은 마미야 린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궁발기담」을 저술하였다.[3]

기무라 아키라는 『마미야 린조(間宮林蔵)』를 저술하여 고단샤(講談社)에서 1982년에 출판하였고, 후에 문고판으로도 발매되었다.[4]

이케나미 쇼타로는 단편집 「화염의 무사(炎の武士)」에 「북해의 사냥꾼(北海の猟人)」을 수록하였다.[5]

호쿠호 켄조는 『린조의 모습(林蔵の貌)』을 썼다.[6]

미나모토 타로는 『풍운아들』에 마미야를 등장시켰다.[7]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사부와 이치 탐정수첩』(츠지 마사키(辻真先)의 소설판)에 마미야를 등장시켰다.[8]

우류 타쿠조는 『마미야 린조(間宮林蔵)』를 저술하였다.[9]

타카하시 다이스케는 『마미야 린조 - 탐험가 일대기(間宮林蔵・探検家一代)』를 저술하였다.[10]

참조

[1] 웹사이트 MAMIYA RINZO STRAIT,Asiatic Russia - Antique Prints and Antique Maps from https://web.archive.[...] Vintage-Views.com 2012-12-01
[2] 웹사이트 ja:間宮林蔵の子孫が一堂に 茨城県・伊奈町 https://web.archive.[...] 2003-10-25
[3] Kotobank 2022-03-21
[4] 웹사이트 茨城県出身の測量士ならびに探検家であった間宮林蔵の地理学的偉業に関する私的考察 https://www.gsj.jp/d[...] 産総研地質調査総合センター 2024-12-19
[5] 서적 間宮林蔵・探検家一代 中公新書ラクレ
[6] 서적 ヌルガン永寧寺遺跡と碑文:15世紀の北東アジアとアイヌ民族 北海道大学出版会 2008
[7] 웹사이트 Russia express社旅行記:ティル村の重建永寧寺跡を訪ねる旅 https://www.russia-e[...]
[8] 문서 大江戸今昔めぐり
[9] 문서 大江戸今昔めぐり、実測 東京全図 内務省地理局 1875
[10] 서적 江戸期文化人の死因 思文閣出版 2008
[11] 웹사이트 間宮林蔵の養子鉄次郎孝順の実家について https://blog.goo.ne.[...] 探墓巡礼顕彰会 2017-07-19
[12]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13] 뉴스 間宮林蔵の子孫が一堂に 茨城県・伊奈町 https://web.archive.[...] 2003-10-25
[14] Kotobank 2022-03-21
[15] 웹사이트 Russia express社旅行記:ティル村の重建永寧寺跡を訪ねる旅 https://www.russia-e[...]
[16] 서적 江戸期文化人の死因 思文閣出版 2008
[17] 웹인용 間宮林蔵の養子鉄次郎孝順の実家について https://blog.goo.ne.[...] 探墓巡礼顕彰会 2017-07-19
[18]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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